노히트노런, 투수가 9회 동안 단 한명의 타자에게도 안타 및 실점을 내주지 않는 경기(단 몸에 맞는 볼, 볼넷, 실책은 가능)을 말한다. 퍼펙트게임(아예 아무도 출루를 못하는 경기)에 비해서 많은 투수들이 기록하긴 했지만 그래도 프로에서 단 한 번도 기록하기 힘들 대기록임은 맞다. 그런데 KBO리그 최초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는 누구일까? 바로 해태타이거즈 투수 방수원이다. 그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은 선수로도 유명한데 오늘은 투수 방수원의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1. KBO 최초 노히트노런 방수원 그는 어떤 투수인가?
1960년 광주출생, 광주일고와 영남대에서 야구를 했지만 1982년 그가 대학교 3학년 때, 해태타이거즈가 창단을 하면서 대학교를 그만두고 입단한다.
그는 입단 초기 해태의 선발로 157이닝 6승 7패, 방어율 3.91을 거두며 평범한 활약을 하였지만 이후 자신의 동기 이상윤이 20승 투수로 진화하면서 선발에서 밀려 중간계투요원으로 활약한다. 그는 통산 197경기 599.2이닝을 소화하며 18승 29패 18세이브 평균 자책 3.72를 남긴 기록상으로 보면 아주 평범한 선수였다. 1990년에 은퇴한 그는 당시에는 중간계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홀드의 개념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인정을 못받는 것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방수원은 자신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는 세이브 기록에 대한 집착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중간 계투로 나와 다른 경기처럼 뛰고 있는 방수원은 이제 한 타자만 잡으면 세이브를 기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해태 김응용 감독은 점차 경기를 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이 직접 교체신호를 전달하기 위해 마운드의 방수원에게 간다. 이후 방수원이 가지고 있는 공을 빼앗고 교체를 말했는데 방수원은 멈칫하더니 2루까지 도망가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김응용 감독 역시 끝까지 쫓아가 공을 빼앗았다는 점인데, 이후 이 경기로 인해 잠시 1군 엔트리에 빠져야 하는 슬픔도 겪게 된다.
여튼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선수 생활은 그리 두각을 나타냈다고는 할 수 없었다.
2. 노히트노런 당시의 투수 방수원 이야기
앞서 말한 것처럼 크게 잘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KBO의 최초 노히트노런의 선수로 기록되었을까?
그가 노히트노런을 만들어낸건 1984년 어린이날 때였다. 당시 상대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약체팀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삼미슈퍼스타즈였다. 이날 경기에 사실 방수원의 선발 등판은 계획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어떠한 이유로 선발 선수가 나오지 못하게 되었고 이때 방수원 선수가 등장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방수원은 또 2회 정도 던지고 들어가겠지라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했다고 한다. 그는 예상한 2회를 잘 마무리한 후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것 같아 야구 스파이크를 벗고 쉬고 있는데 수석코치가 대뜸 와서 하는 말이 감독 사인도 안떨어졌는데 쉬고 있냐며 나가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3회도 교체되지 않았고 마운드에 오른 4회에 볼넷을 내주며 약간 흔들리자 김응용이 덕아웃에서 나오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바뀌려나 했는데 관중들의 함성이 이어져서 그랬는지 감독이 다시 덕아웃으로 들어갔다. 이후 여러 위기들이 있었지만 그날따라 수비도 잘해주면서 마지막 아웃카운트 1개를 남긴 상태까지 간다.
사실 방수원이 그동안 중간계투로 활약했기 때문에 9회 모두를 책임지는건 힘든 상황이었다. 아웃카운트가 1개 남은 시점에서는 거의 방전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당시 포수 유승안이 마운드에 올라 방수원에게 이제 딱 1개 남았다며 정신 집중해서 던져라고 말을 해준다. 이에 방수원은 기어코 아웃을 잡아냈고 KBO 최초의 노히트노런이자 자신의 개인 기록에 있어서는 1985년 자신이 따낸 유일한 1승이자 선수생활 내내 유일한 완봉승이었다.
당시 반응은 강철팔 최동원, 박철순 등이 아닌 방수원이 노히트노런을 했다는 소식에 야구팬들 모두가 놀라워했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였다.
3. 동생의 이름으로 평생을 산 방수원 가족일화
방수원의 원래 이름은 방승원이다. 방수원은 놀랍게도 그의 동생 이름인데, 초등학교시절 그의 동생이 실종되면서 아버지가 호적을 정리하던 도중 실수로 방승원의 호적을 말소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동생 이름 방수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방수원이 해태타이거즈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게 된 실종되었던 동생이 잠실경기장으로 찾아오게 되었고, 당시 그 동생의 이름은 방수원에서 개명한 방득원이었다. 방수원은 자신을 찾아온 동생을 보고 너무 흥분하여 경기에 참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더니 김응용 감독이 이를 듣고 '뭔 헛소리야 뛰어'라고 했다는 것이 전설로 남겨진 일화이다.
지금까지 평범한 선수였지만 KBO의 최초 노히트노런 기록의 보유자로 이름을 올린 방수원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그때 당시 그의 선수 생활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그의 일화로 봤을 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집념으로 뛰던 선수였다는 점이다. 프로야구 역사에 이름을 알린 방수원을 기억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끝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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